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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잔지바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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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잔지바르 전쟁은 1896년 8월 27일, 영국이 잔지바르의 새로운 술탄 할리드 빈 바르가쉬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퇴위를 요구하며 발생한 짧은 전쟁이다. 영국은 하마드 빈 투와이니의 사망 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바르가쉬에게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그가 이를 거부하고 군대를 소집하자 해군을 동원하여 궁전을 포격했다. 38분간의 교전 끝에 바르가쉬는 독일 영사관으로 도주하고, 영국은 친영적인 하무드 빈 무함메드를 술탄으로 옹립했다. 이 전쟁은 역사상 가장 짧은 전쟁 중 하나로 기록되며, 영국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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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잔지바르 전쟁
지도 정보
기본 정보
함포 사격 후의 술탄의 궁전
함포 사격 후의 술탄의 궁전
분쟁영국-잔지바르 전쟁
일부아프리카 분할
날짜1896년 8월 27일 오전 9시 2분 – 9시 40분 동아프리카 시간(EAT) (약 38분)
장소잔지바르 보호국 잔지바르 타운
결과영국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영국
교전국 2잔지바르 술탄국
지휘관
지휘관 1해리 로손
로이드 매튜스
지휘관 2할리드 빈 바르가시
살레
병력 규모
병력 1육군: 1,050명
해군:
순양함 2척
포함 3척
병력 2육군: 2,800명
대포 4문
해안포 1문
해군:
(왕실 요트)
런치 2척
사상자
사상자 1부상 1명
사상자 2사망 또는 부상 500명
글래스고 침몰
런치 2척 침몰
해안포 1문 파괴

2. 배경

1896년 8월 25일, 영국의 식민 경영에 협조적이었던 잔지바르의 술탄 하마드 빈 수와이니가 사망했다. 이후 술탄의 지위는 무력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그의 조카 할리드 빈 바르가쉬에게 넘어갔다. 영국은 하무드 빈 무함메드를 새 술탄 후보로 지지했는데, 그와 협력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바르가쉬에게 술탄에서 물러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바르가쉬는 이를 거부하고 약 2,800명 규모의 군대를 소집했다. 또한 항구에 정박 중이던 요트인 HMS 글래스고를 무장시켰다.

바르가쉬군이 궁전을 요새화하는 동안, 영국 해군은 궁궐 정면의 항구에 5척의 전함을 집결시켰다. 이 함정들은 3척의 현대적인 순양함인 에드가급 순양함 HMS 세인트조지 호, 펄급 장갑순양함 HMS 필로멜 호, 아처급 순양함 HMS 라쿤 호와 두 척의 포함인 HMS 트러쉬 호 및 HMS 스패로우 호였다. 마침 이 5척은 정기적인 크리켓 경기를 하기 위해 가까운 해역에 모여 있던 상황이었다. 영국군은 해병대를 상륙시켜 전 영국 해군 중위인 로이드 매슈스 장군이 지휘하는 900명 규모의 잔지바르 왕당파 정규군을 지원하도록 했다.

2. 1. 잔지바르 술탄국

잔지바르인도양의 탕가니카 해안에 위치했던 섬나라로, 현재는 탄자니아의 일부이다. 중심지인 웅구자(잔지바르섬)는 1499년 점령 선언을 했던 포르투갈 식민 지배자들을 몰아낸 1698년부터 명목상으로는 오만 술탄의 지배하에 있었다.[65] 술탄 마지드 빈 사이드는 1858년 잔지바르의 부사이디 왕조 오만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하고 영국의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오만과 술탄 자리를 분리했다.[65] 2대 술탄이자 할리파의 아버지인 바르가시 빈 사이드는 영국의 최후통첩과 봉쇄 위협으로 1873년 6월 노예 매매 금지가 강제되었다. 그러나 1873년 6월 당시 영국 대리 영사였던 존 커크 박사는 한편으로는 잔지바르를 봉쇄한다는 위협으로 노예 매매 금지와 노예 시장 폐쇄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내라는 지시와, 다른 한편으로는 잔지바르에서 전쟁 행위로 받아들여져 프랑스 보호령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봉쇄를 강제하지 말라는 지시라는, 상반되는 두 가지 런던발 지시를 동시에 받았다.[66]

이후 술탄들은 잔지바르 섬의 스톤 타운에 수도와 관청을 두고 해안에 궁전을 세웠다. 1896년 당시 궁전은 왕궁 외에 부속 하렘인 “베이트 알-후쿰(Beit al-Hukm)”, 동아프리카에서 최초로 전기가 공급된 건물인 베이트 알 아자이브(Beit al-Ajaib, 다른 이름: 하우스 오브 원더스(House of Wonders))로 구성되었다.[67] 이 궁전은 대부분 현지 목재로 건설되었고, 방어 시설로 설계되지 않았다.[68] 이 세 건물은 나란히 붙어 있었고, 목조 지붕이 있는 현관으로 연결되어 있었다.[69]

영국은 오랜 우호적인 교류 후 1886년 잔지바르의 주권과 술탄의 지위를 인정하고, 기본적으로 잔지바르와 술탄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65][70][71] 그러나 독일도 동아프리카에 관심을 보였고, 두 나라는 19세기 후반에 걸쳐 이 지역의 무역권과 영토 지배를 놓고 경쟁했다.[72] 술탄 할리파 빈 사이드는 영국에 케냐, 독일에 탕가니카의 권익을 부여했고, 이는 그 지역에서의 노예 매매 금지와 연결되었다.[65] 지배 계급인 아랍인의 대부분은 이 귀중한 거래에 대한 방해에 반발하여 아부시리 반란을 일으켰다.[65] 또한 탕가니카의 독일 당국은 잔지바르 술탄국의 깃발을 게양하는 것을 거부하여 독일군과 현지 주민 간의 무력 충돌을 허용했다.[73] 탕가에서 발생한 충돌에서는 아랍인 20명이 목숨을 잃었다.[73]

할리파는 탕가니카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전 영국 해군 중위 로이드 매슈스 준장이 이끄는 잔지바르 부대를 파견했다.[74] 작전은 대성공이었지만, 잔지바르인들의 반독일 감정은 강하게 남았다.[73] 바가모요에서 추가 충돌이 발생하여 원주민 150명이 독일군에 의해 살해되었고, 켓와에서는 독일 관리와 그의 하인이 살해되었다.[74] 이후 할리파는 노예 매매를 중단시키기 위해 독일의 지원을 받아 해상 봉쇄를 실시하고 있던 영국 동아프리카 회사(IBEAC)에 광범위한 무역권을 인정했다.[74] 1890년 할리파가 죽자 알리 빈 사이드가 술탄이 되었다.[75] 술탄 알리는 지역 내 노예 매매를 금지했고(단, 노예 소유는 허용됨), 잔지바르가 영국의 보호국이 되는 것을 선언하고, 로이드 매슈스를 내각의 총리로 임명했다. 또한 영국은 미래의 술탄 지명에 대한 거부권을 보장받았다.[76]

알리가 술탄에 즉위한 같은 해, 영국과 독일은 헬골란트-잔지바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서 공식적으로 동아프리카의 이권 지역의 경계를 정하고, 독일은 잔지바르에서의 권익을 영국에 양도했다.[77] 이로써 이미 1804년부터 잔지바르에서의 노예 금지를 목표로 하고 있던 영국 정부는 잔지바르에서의 영향력을 높였다.[78][79]

술탄 알리의 뒤를 이은 하마드 빈 투와이니는 1893년 술탄이 되었다. 하마드는 영국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국민 중에는 국내에서의 영국의 지배 확대와 영국 지휘하의 군대, 귀중한 노예 매매 금지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76] 이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 영국 당국은 술탄에게 1천 명의 잔지바르 왕궁 근위대를 창설하는 것을 허용했지만, 근위대는 곧 영국 지휘하의 경찰과 충돌했다.[80][81] 근위대의 행동에 대한 불만은 잔지바르 타운의 유럽 거주민들로부터도 제기되었다.[76]

2. 2. 영국의 개입

1896년 8월 25일, 영국의 식민 경영에 협조적이었던 잔지바르의 술탄 하마드 빈 수와이니가 사망했다. 이후 술탄의 지위는 무력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그의 조카 할리드 빈 바르가쉬에게 넘어갔다. 영국은 하무드 빈 무함메드를 새로운 술탄 후보로 지지했는데, 그와 협력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바르가쉬에게 술탄에서 물러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바르가쉬는 이를 거부하고 약 2,800명 규모의 군대를 소집했다. 또한 항구에 정박 중이던 요트인 HMS 글래스고를 무장시켰다.

바르가쉬군이 궁전을 요새화하는 동안, 영국 해군은 궁궐 정면의 항구에 5척의 전함을 집결시켰다. 이 함정들은 3척의 현대적인 순양함인 에드가급 순양함 HMS 세인트조지 호, 펄급 장갑순양함 HMS 필로멜 호, 아처급 순양함 HMS 라쿤 호와 두 척의 포함인 HMS 트러쉬 호 및 HMS 스패로우 호였다. 마침 이 5척은 정기적인 크리켓 경기를 하기 위해 가까운 해역에 모여 있던 상황이었다. 영국군은 해병대를 상륙시켜 전 영국 해군 중위인 로이드 매슈스 장군이 지휘하는 2개 대대 900명 규모의 잔지바르 왕당파 정규군을 지원하도록 했다.

한편, 영국과 잔지바르 술탄국은 우호적인 관계였지만, 독일 또한 동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지면서 양국은 경쟁 관계에 있었다.[72] 할리파 술탄은 케냐의 토지를 영국에, 탕가니카의 토지를 독일에 할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노예 제도가 금지되었다.[65] 아랍 지배 계급은 이 귀중한 무역의 중단에 분노했고, 이는 아부시리 반란으로 이어졌다.[65] 탕가니카의 독일 당국이 잔지바르 술탄국의 국기를 게양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독일군과 현지 주민 간 무력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73]

할리파 술탄은 탕가니카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로이드 매슈스 장군이 이끄는 잔지바르 군대를 파견했다.[74] 이 작전은 대체로 성공적이었지만, 잔지바르 국민들의 반독일 감정은 여전히 강했다.[73] 바가모요에서 더 많은 충돌이 발생하여 150명의 원주민이 독일군에 의해 살해되었고, 켓와에서는 독일 관리들과 그들의 하인들이 살해되었다.[74] 이후 할리파는 영국 동아프리카 회사(IBEAC)에 광범위한 무역권을 부여했고, 회사는 계속되는 국내 노예 무역을 중단시키기 위해 해상 봉쇄를 실시했다.[74] 1890년 할리파가 사망하자 알리 빈 사이드가 술탄이 되었다.[75] 알리 술탄은 국내 노예 무역(그러나 노예 소유는 허용)을 금지하고, 잔지바르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포하고, 로이드 매튜스를 총리로 임명하여 그의 내각을 이끌게 했다. 영국은 또한 미래 술탄 임명에 대한 거부권을 보장받았다.[76]

알리 술탄이 즉위한 해, 영국과 독일은 헬골란트-잔지바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동아프리카의 이권 지역을 공식적으로 경계하고, 잔지바르에 대한 독일의 권리를 영국에 양도했다.[77] 이로써 영국 정부는 잔지바르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했고, 1804년부터 추진해 온 목표인 노예 제도 근절을 위해 이를 활용하려 했다.[78][79]

1893년, 알리 술탄의 후계자 하마드 빈 투와이니가 술탄이 되었다. 하마드는 영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의 신하들 사이에서는 점점 더 강해지는 영국의 통제, 영국이 이끄는 군대, 그리고 귀중한 노예 무역의 폐지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76] 이러한 반감을 통제하기 위해 영국 당국은 술탄에게 1,000명의 잔지바르 궁궐 경호대를 편성할 권한을 주었지만, 이 군대는 곧 영국이 이끄는 경찰과 충돌을 빚게 되었다.[80][81] 잔지바르 시 유럽 거주민들로부터도 경호대의 활동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었다.[76]

2. 3. 독일과의 경쟁

영국은 오랫동안 잔지바르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1886년 잔지바르의 주권과 술탄국을 인정했다.[3][8][9] 그러나 19세기 후반, 독일 역시 동아프리카 지역에 관심을 가지면서 두 강대국은 무역권과 영토를 두고 경쟁하기 시작했다.[10] 할리파 술탄은 케냐의 토지를 영국에, 탕가니카의 토지를 독일에 할당했고, 이 과정에서 해당 지역의 노예 제도가 금지되었다.[3]

이러한 상황은 귀중한 무역이 중단된 것에 분노한 많은 아랍 지배 계급의 불만을 야기했고, 이는 일부 불안으로 이어졌다.[3] 탕가니카의 독일 당국이 잔지바르 술탄국의 국기 게양을 거부하면서 독일군과 현지 주민 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11] 탕가에서 발생한 충돌에서는 20명의 아랍인이 사망했다.[11]

할리파 술탄은 전 왕립 해군 중위였던 로이드 매튜스가 이끄는 잔지바르 군대를 파견하여 탕가니카의 질서를 회복하려 했다.[12] 이 작전은 대체로 성공했지만, 잔지바르 국민들 사이에서는 반독일 감정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었다.[11] 바가모요에서는 150명의 원주민이 독일군에 의해 살해되었고, 켓와에서는 독일 관리들과 그들의 하인들이 살해되는 등 더 많은 충돌이 발생했다.[12]

이후 할리파는 독일의 지원을 받은 영국 동아프리카 회사(IBEAC)에 광범위한 무역권을 부여했고, 회사는 계속되는 국내 노예 무역을 중단시키기 위해 해상 봉쇄를 실시했다.[12] 1890년 할리파가 사망하자 알리 빈 사이드가 술탄이 되었다.[13] 알리 술탄은 국내 노예 무역(그러나 노예 소유는 아님)을 금지하고, 잔지바르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포하고, 로이드 매튜스를 총리로 임명하여 그의 내각을 이끌게 했다. 영국은 또한 미래 술탄 임명에 대한 거부권을 보장받았다.[14]

알리 술탄 즉위와 같은 해에 영국과 독일은 헬골란트-잔지바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동아프리카의 이권 지역을 공식적으로 경계하고, 잔지바르에 대한 독일의 권리를 영국에 양도했다.[15] 이로써 영국 정부는 잔지바르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했고, 1804년부터 추진해 온 목표인 노예 제도 근절을 위해 이를 활용하려 했다.[16][17]

3. 전쟁의 발발

1896년 8월 25일, 영국의 식민 경영에 협조적이었던 잔지바르의 술탄 하마드 빈 수와이니가 사망하자, 그의 조카 할리드 빈 바르가쉬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14] 영국은 하무드 빈 무함메드를 새로운 술탄 후보로 지지했고, 바르가쉬에게 술탄에서 물러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76]

바르가쉬는 이를 거절하고 군대를 소집했다. 약 2,800명 규모의 군대는 항구에 정박 중이던 요트 HMS 글래스고를 무장시켰다.[82] 그는 케이브의 경고를 무시하고, 왕궁 근위대의 살레 대위(Captain Saleh)를 지휘관으로 하여 군대를 궁전 광장에 집결시켰다. 이날 하루 동안 라이플총과 머스킷총으로 무장한 병력은 2,800명에 달했으며, 대부분은 일반 시민이었으나 칼리드 편에 선 잔지바르인 아스카리 70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82][84] 맥심 기관총, 개틀링포 1문, 17세기 청동포 1문, 12파운드 야포 2문으로 구성된 포병은 항만 내 영국 함선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82][84][85]

8월 27일 오전 8시, 할리드는 사자를 보내 케이브에게 회담을 요청했지만, 영사는 할리드가 최후통첩을 수락할 경우에만 응하겠다고 답했다.[68][94] 오전 8시 30분, 할리드는 다시 사자를 보내 "우리는 항복할 의사가 없지만, 귀국이 우리를 공격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고 밝혔다. 케이브는 "우리는 공격하고 싶지 않지만, 당신이 전한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공격하게 될 것이다"라고 답했다.[93]

영국은 8월 27일 오전 9시까지 깃발을 내리고 궁궐을 떠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경고했다.[92] 오전 8시 55분, 궁전으로부터의 답변은 없었고, 세인트 조지 함상의 로슨은 "공격 준비" 신호를 내걸었다.[95]

오전 9시 정각, 로이드 매슈스는 영국 함선에 포격 개시를 명령했다.[90][96] 9시 2분, 라쿤과 트러쉬가 동시에 궁전에 대한 포격을 개시했고, 트러쉬의 첫 포탄이 잔지바르군의 12파운드 포를 즉시 무력화시켰다. 고폭탄은 나무 상자와 짚단, 고무로 만든 바리케이드에도 불구하고, 궁전안에 있던 3000명의 수비병과 하인, 노예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할리드는 포로로 잡혀 인도로 유배되었다고 처음에는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궁전을 탈출했다.[68][97] 포격은 9시 40분경, 궁전과 부속 하렘이 불이 나고, 할리드 측 포병이 침묵하고 깃발이 격추되었을 때 종료되었다.[121]

3. 1. 하마드 빈 투와이니의 사망과 할리드 빈 바르가시의 즉위

1896년 8월 25일, 영국의 식민 경영에 협조적이었던 잔지바르의 술탄 하마드 빈 수와이니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76] 그의 조카인 할리드 빈 바르가쉬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14] 영국은 하무드 빈 무함메드를 새로운 술탄 후보로 지지했고, 바르가쉬에게 술탄에서 물러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76]

바르가쉬는 이를 거절하고 군대를 소집했다. 이 군대는 약 2,800명 규모였으며, 항구에 정박 중이던 요트인 HMS 글래스고를 무장시켰다.[82] 바르가쉬군이 궁전을 요새화하는 동안, 영국 해군은 5척의 전함을 궁궐 정면의 항구로 집결시켰다.[82]

하마드의 사망 시각은 1896년 8월 25일 오전 11시 40분(UTC 오전 8시 40분)이었다.[76] 하마드의 암살을 의심받고 있던 그의 29세 사촌 칼리드 빈 바르가시는 영국과 알리 사이에 체결된 협정을 위반하여 영국의 승인 없이 잔지바르 타운의 궁전에 들어갔다.[76] 영국 정부는 친영적인 성향을 보였던 또 다른 후보자 하무드 빈 무함메드가 술탄이 되기를 원했다. 칼리드는 잔지바르 영사 겸 외교관인 바질 케이브와 매슈스 장군으로부터 자신의 행동을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경고를 받았다.[81][82]

칼리드는 케이브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의 군대를 왕궁 근위대의 살레 대위(Captain Saleh)를 지휘관으로 하여 궁전 광장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날 하루 동안 라이플총과 머스킷총으로 무장한 병력은 2,800명에 달했다. 대부분은 일반 시민이었지만, 칼리드 편에 선 잔지바르인 아스카리 70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82][84] 맥심 기관총, 개틀링포 1문, 17세기 청동포 1문, 12파운드 야포 2문으로 구성된 포병은 항만 내 영국 함선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82][84][85]

케이브는 계속해서 칼리드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왕궁을 떠나 자택으로 돌아가라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무시되었고, 칼리드는 오후 3시에 자신이 술탄이라고 선언할 것이라고 답했다. 케이브는 이것은 반란 행위이며 칼리드의 술탄 자리는 영국 정부가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82] 오후 2시 30분, 하마드가 매장되었고, 그 30분 후 정확히 왕궁에서 칼리드의 즉위를 선포하는 예포가 발사되었다.

3. 2. 영국의 최후통첩

1896년 8월 25일, 영국의 식민 경영에 협조적이었던 잔지바르의 술탄 하마드 빈 수와이니가 사망하자, 그의 조카 할리드 빈 바르가쉬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76] 영국은 하무드 빈 무함메드를 새로운 술탄 후보로 지지했고, 바르가쉬에게 술탄에서 물러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76]

바르가쉬는 이를 거절하고 군대를 소집했다. 약 2,800명 규모의 군대는 항구에 정박 중이던 요트 HMS 글래스고를 무장시켰다.[82][84] 그는 케이브의 경고를 무시하고, 왕궁 근위대의 살레 대위(Captain Saleh)를 지휘관으로 하여 군대를 궁전 광장에 집결시켰다. 이날 하루 동안 라이플총과 머스킷총으로 무장한 병력은 2,800명에 달했으며, 대부분은 일반 시민이었으나 칼리드 편에 선 잔지바르인 아스카리 70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82][84] 맥심 기관총, 가틀링포 1문, 17세기 청동포 1문, 12파운드 야포 2문으로 구성된 포병은 항만 내 영국 함선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82][84][85]

영국은 8월 27일 오전 9시까지 깃발을 내리고 궁궐을 떠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경고했다.[92] 케이브는 할리드와 추가 협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로손은 할리드에게 8월 27일 오전 9시까지 깃발을 내리고 궁궐을 떠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그렇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통보했다.

3. 3. 할리드의 저항

1896년 8월 25일, 영국의 식민 경영에 협조적이었던 잔지바르의 술탄 하마드 빈 수와이니가 사망했다. 이후 술탄의 지위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그의 조카 할리드 빈 바르가쉬에게 넘어갔다. 영국은 하무드 빈 무함메드를 새로운 술탄 후보로 지지했고, 바르가쉬에게 술탄에서 물러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바르가쉬는 이를 거절하고 군대를 집결시켰는데, 이 군대는 약 2,800명 규모였으며 항구에 정박 중이던 요트인 HMS 글래스고를 무장시켰다.[14]

칼리드는 케이브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의 부대는 궁궐 경비대장 살레 대위의 지휘 아래 궁전 광장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하루가 끝날 무렵, 그들은 소총과 머스켓으로 무장한 2,800명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20] 대부분은 민간인이었지만, 칼리드 편에 선 700명의 잔지바르 아스카리 병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20][22] 술탄의 포병은 여러 정의 맥심 기관총, 개틀링 건, 17세기 청동 대포, 그리고 두 문의 12파운드 야포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항구에 있는 영국 함선을 겨냥했다.[20][22][23] 12파운드 야포는 독일 제국 황제인 빌헬름 2세가 술탄에게 선물한 것이었다.[20] 술탄의 군대는 또한 잔지바르 해군을 장악했는데, 이는 영국 프리깃 HMS 글래스고를 기반으로 1878년 술탄을 위해 왕실 요트로 건조된 한 척의 목조 슬루프인 HHS 글래스고였다.[24]

8월 27일 오전 8시, 할리드는 사자를 보내 케이브에게 회담을 요청했지만, 영사는 할리드가 최후통첩을 수락할 경우에만 응하겠다고 답했다.[68][94] 오전 8시 30분, 할리드는 다시 사자를 보내 "우리는 항복할 의사가 없지만, 귀국이 우리를 공격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고 밝혔다. 케이브는 "우리는 공격하고 싶지 않지만, 당신이 전한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공격하게 될 것이다"라고 답했다.[93] 오전 8시 55분, 궁전으로부터의 답변은 없었고, 세인트 조지 함상의 로슨은 "공격 준비" 신호를 내걸었다.[95]

오전 9시 정각, 로이드 매슈스는 영국 함선에 포격 개시를 명령했다.[90][96] 9시 2분, 라쿤이 동시에 궁전에 대한 포격을 개시했고, 트러쉬의 첫 포탄이 잔지바르군의 12파운드 포를 즉시 무력화시켰다. 3000명의 수비병과 하인, 노예들이 큰 목조 궁전 안에 있었지만, 나무 상자와 짚단, 고무로 만든 바리케이드에도 불구하고, 고폭탄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할리드는 포로로 잡혀 인도로 유배되었다고 처음에는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궁전을 탈출했다.[68][97] 포격은 9시 40분경, 궁전과 부속 하렘이 불이 나고, 할리드 측 포병이 침묵하고 깃발이 격추되었을 때 종료되었다.[121]

4. 전쟁의 경과

1896년 8월 25일, 영국의 식민 통치에 협조적이었던 잔지바르의 술탄 하마드 빈 수와이니가 사망했다. 이후 술탄 지위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그의 조카 할리드 빈 바르가쉬에게 넘어갔다. 영국은 하무드 빈 무함메드를 새 술탄 후보로 지지했고, 바르가쉬에게 술탄에서 물러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바르가쉬는 이를 거절하고 약 2,800명 규모의 군대를 집결시켰으며, 항구에 정박 중이던 요트 HMS 글래스고를 무장시켰다.

바르가쉬 군이 궁전을 요새화하는 동안, 영국 해군은 궁궐 정면 항구에 5척의 전함을 집결시켰다. 이 함정들은 에드가급 순양함 HMS 세인트조지 호, 펄급 장갑순양함 HMS 필로멜 호, 아처급 순양함 HMS 라쿤 호와 포함 HMS 트러쉬 호, HMS 스패로우 호였다. 영국군은 해병대를 상륙시켜 전 영국 해군 중위 로이드 매슈 장군이 지휘하는 900명 규모의 잔지바르 왕당파 정규군 2개 대대를 지원하도록 했다.

영국 함선 5척의 폭격 장면을 묘사한 당시 그림


바르가쉬는 미국 대표부를 통해 평화 협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1896년 8월 27일 오전 9시, 잔지바르는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2분 뒤 영국 해군은 잔지바르 궁궐과 HMS 글래스고를 향해 함포 사격을 개시했다. 바르가쉬의 무장 요트 글래스고는 격침되었고, 궁궐은 무너지고 사상자가 발생했다. 바르가쉬는 독일 제국 영사관으로 퇴각하여 보호를 요청했다. 포격은 38분 만에 중지되었고, 잔지바르 측 사상자는 500여 명에 달했다.

4. 1. 영국 해군의 포격

1896년 8월 27일 오전 9시, 로이드 매슈스 장군은 영국 함선들에게 포격을 시작하라고 명령했다.[27][33] 9시 2분, 영국 해군 함선 ''라쿤'', ''쓰러쉬'', ''스패로우''가 동시에 궁전에 사격을 개시했다. ''쓰러쉬''의 첫 번째 포격은 곧바로 아랍의 12파운드포를 무력화시켰다.[90][96] 대부분 나무로 지어진 궁전에는 3,000명의 수비병, 하인, 노예들이 있었고, 상자, 건초, 고무로 만든 방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성능 폭약탄의 피해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초기에는 그가 체포되어 인도로 유배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지만, 술탄 할리드는 궁전에서 탈출했다.[6][34] 로이터 통신원은 술탄이 "아랍 지도자들과 함께 첫 포격에 도망쳤고, 그들의 노예와 추종자들을 남겨두고 싸움을 계속하게 했다"고 보도했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그가 더 오랫동안 궁전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68] 약 9시 40분에 포격이 중단되었는데, 그때쯤 궁전과 첩실은 불이 붙었고, 술탄의 포병은 무력화되었고 그의 깃발은 내려졌다.[58]

포격 중에 9시 5분, 낡은 ''HMS 글래스고''호가 7문의 9파운드포와 빅토리아 여왕이 술탄에게 선물한 개틀링 건으로 ''세인트 조지''호에 사격을 가하면서 소규모 해전이 발생했다.[35] 반격으로 ''글래스고우''호가 침몰했지만, 얕은 항구 때문에 돛대는 물 위에 남아 있었다.[121] ''글래스고우''호의 승무원들은 항복의 표시로 영국 국기를 게양했고, 모두 발사대에 있는 영국 선원들에게 구조되었다.[58] ''쓰러쉬''호는 또한 잔지바르 승무원들이 소총으로 사격한 두 척의 증기 발사대를 침몰시켰다. 할리드의 부하들이 레이크스의 아스카리에게 사격하면서 약간의 육상전투가 발생했지만, 그들이 궁전에 접근하면서 거의 효과가 없었다.[121]

4. 2. 잔지바르의 저항과 패배

1896년 8월 25일, 영국의 식민 경영에 협조적이었던 잔지바르의 술탄 하마드 빈 수와이니가 사망했다. 이후 술탄의 지위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그의 조카 할리드 빈 바르가쉬에게 넘어갔다. 영국은 하무드 빈 무함메드를 새로운 술탄 후보로 지지했고, 바르가쉬에게 술탄에서 물러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바르가쉬는 이를 거절하고 약 2,800명 규모의 군대를 집결시켰으며, 항구에 정박 중이던 요트인 HMS 글래스고를 무장시켰다.

바르가쉬군이 궁전을 요새화하는 동안, 영국 해군은 5척의 전함을 궁궐 정면의 항구로 집결시켰다. 이 함정들은 3척의 현대적인 순양함인 에드가급 순양함 HMS 세인트조지 호, 펄급 장갑순양함 HMS 필로멜 호, 아처급 순양함 HMS 라쿤 호와 두 척의 포함인 HMS 트러쉬 호 및 HMS 스패로우 호였다. 영국군은 해병대를 상륙시켜 전 영국 해군 중위인 로이드 매슈 장군이 지휘하는 2개 대대 900명 규모의 잔지바르 왕당파 정규군을 지원하도록 했다.

바르가쉬가 막판에 미국 대표부를 통해 평화 협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1896년 8월 27일 오전 9시에 잔지바르는 영국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2분 뒤 영국 해군은 잔지바르 궁궐과 HMS 글래스고를 향해 함포 사격을 개시했다. 바르가쉬의 무장 요트 글래스고는 격침되었고, 궁궐이 무너지고 사상자가 발생했다. 바르가쉬는 독일 제국 영사관으로 퇴각하여 보호를 요청했다. 포격은 38분 만에 중지되었고, 잔지바르측 사상자는 500여 명에 달했다.

4. 3. 짧은 전쟁의 종결

1896년 8월 27일 오전 8시, 할리드가 파견한 사자가 케이브에게 휴전 교섭을 요청했지만, 케이브는 최후통첩 조건에 동의해야만 살 수 있다고 답했다.[6][31] 8시 30분, 할리드는 다시 사자를 보내 "우리는 깃발을 내릴 의향이 없으며, 당신들이 우리에게 사격을 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선언했고, 케이브는 "우리는 사격을 하고 싶지 않지만, 당신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30] 오전 8시 55분, 궁전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자, ''세인트 조지''호에 탑승한 해리 로손은 "작전 준비" 신호를 올렸다.[32]

정확히 9시, 로이드 매슈스 장군은 영국 함선들에게 폭격을 시작하라고 명령했다.[27][33] 9시 2분, 영국 해군 함선 ''라쿤'', ''쓰러쉬'', ''스패로우''호가 동시에 궁전에 사격을 개시했다. ''쓰러쉬''호의 첫 번째 포격은 아랍의 12파운드포를 즉시 무력화시켰다. 대부분 나무로 지어진 궁전에는 3,000명의 수비병, 하인, 노예들이 있었고, 상자, 건초, 고무로 만든 방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성능 폭약탄의 피해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초기에는 할리드가 체포되어 인도로 유배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궁전에서 탈출했다.[6][34] 로이터 통신원은 할리드가 "아랍 지도자들과 함께 첫 포격에 도망쳤고, 그들의 노예와 추종자들을 남겨두고 싸움을 계속하게 했다"고 보도했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그가 더 오랫동안 궁전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6]

포격 중에 9시 5분, 낡은 ''글래스고''호가 7문의 9파운드포와 빅토리아 여왕이 술탄에게 선물한 개틀링 건으로 ''세인트 조지''호에 사격을 가하면서 소규모 해전이 발생했다.[35] 반격으로 ''글래스고''호가 침몰했지만, 얕은 항구 때문에 돛대는 물 위에 남아 있었다.[58] ''글래스고''호의 승무원들은 항복의 표시로 영국 국기를 게양했고, 모두 발사대에 있는 영국 선원들에게 구조되었다.[58] ''쓰러쉬''호는 또한 잔지바르 승무원들이 소총으로 사격한 두 척의 증기 발사대를 침몰시켰다. 할리드의 부하들이 영국 해병에게 사격하면서 약간의 육상전투가 발생했지만, 그들이 궁전에 접근하면서 거의 효과가 없었다.[58]

약 9시 40분에 포격이 중단되었는데, 그때쯤 궁전과 첩실은 불이 붙었고, 술탄의 포병은 무력화되었고 그의 깃발은 내려졌다.[58] 영국은 도시와 궁전을 장악했고, 오후에는 영국에 호의적인 하무드 빈 무함메드가 훨씬 축소된 권력을 가진 술탄으로 임명되었다.[36] 이 교전 중 영국 함선과 승무원들은 약 500발의 포탄, 4,100발의 기관총탄, 1,000발의 소총탄을 발사했다.[37]

이 전쟁은 45분도 채 지속되지 않아 역사상 가장 짧은 전쟁으로 기록되기도 한다.[57] 지속 시간에 대해서는 여러 자료에서 38분,[58][59] 40분,[60] 45분[61] 등으로 다르게 제시하지만,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은 38분이다. 이러한 차이는 전쟁의 시작과 끝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혼란 때문이다. 어떤 자료는 9시 정각에 발포 명령이 떨어진 시점을 전쟁 시작으로 보는 반면, 어떤 자료는 9시 2분에 실제 발포가 시작된 시점을 전쟁 시작으로 본다. 전쟁의 종료 시점은 마지막 총격이 멈추고 궁궐 깃발이 내려진 9시 37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어떤 자료는 9시 45분으로 보기도 한다. 영국 함선의 항해일지 역시 이러한 불확실성을 보여주는데, ''세인트 조지''호는 9시 35분에 휴전이 선포되고 할리드가 독일 영사관에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쓰러시''호는 9시 40분, ''라쿤''호는 9시 41분, ''필로멜''호와 ''스패로우''호는 9시 45분으로 기록하고 있다.[62]

5. 전쟁의 결과

영국-잔지바르 전쟁의 결과, 잔지바르 측에서는 약 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58][38] 이들 대부분은 궁궐을 덮친 화재로 인해 사망했다.[58][38] 칼리드의 포병대는 거의 전멸한 것으로 알려졌다.[39] 반면 영국군에서는 하사관 1명이 중상을 입었으나, 이후 회복되었다.[58]

잔지바르 시민들 대다수는 영국 측을 지지했지만, 인도인 거주 지역에서는 약탈이 발생하여 약 20명의 주민이 사망했다.[40] 질서 유지를 위해 몸바사에서 150명의 시크교 군인들이 파견되어 거리를 순찰했다.[36] 또한, ''세인트 조지''호와 ''필로멜''호의 선원들은 소방대를 조직하여 궁전에서 인근 세관 창고로 번진 화재를 진압했다.[41]

전쟁 이후 영국과 잔지바르 양측의 주요 인물들은 여러 직책과 훈장을 받았다. 아스카리 지휘관 레이크스 장군은 잔지바르 빛나는 별 훈장 1등급(2등급)과 잔지바르 하몬디에 훈장 1등급을 받았고, 잔지바르 군 사령관으로 승진했다.[50][51] 잔지바르 군 사령관 매튜스 장군은 잔지바르 하몬디에 대훈장을 받았고, 잔지바르 정부의 초대 장관 겸 재무장관이 되었다.[51] 영국 영사 베이질 케이브는 바스 훈장을 받았고, 총영사로 승진했다.[52][53] 해리 로슨은 바스 훈장 기사 컴패니언을 받았고,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주 주지사가 되었으며, 영국 해군 제독으로 승진했다.[54]

이 전쟁을 통해 영국 해군의 위력을 확인한 잔지바르는 이후 67년간 영국의 보호령으로 존속하는 동안 영국에 대한 저항을 보이지 않았다.[38]

1902년 잔지바르 타운 항구의 파노라마 사진. 동쪽을 바라보고 촬영되었으며, 침몰한 HMS 글래스고호의 돛대가 보인다. 사진 중앙에는 탑과 많은 발코니가 있는 흰색 건물인 경이로운 집이 있고, 왼쪽에는 후궁과 궁전이 있었으며, 오른쪽에는 영사관 건물이 있다.

5. 1. 할리드의 망명과 하무드의 즉위

1896년 10월 2일, 독일 제국 영사관으로 피신했던 할리드는 해상으로 탈출했다. 할리드는 1916년 영국에 붙잡힐 때까지 다르에스살람에서 망명 생활을 했으며, 이후 몸바사에서 살도록 허가받았고 1925년 그곳에서 사망했다.[45] 영국은 할리드의 지지자들에게 포탄 비용과 약탈로 인한 손해 배상금으로 30만 루피를 지불하도록 강제했다.[36]

하무드 빈 무함메드는 영국의 꼭두각시 통치자로, 술탄제는 유지되었다.[36] 전쟁 후 몇 달 뒤, 하무드는 영국의 제안에 따라 모든 형태의 노예 제도를 폐지했다.[36] 그러나 노예 해방은 느리게 진행되어, 10년이 지나서도 1891년 추산 인구 6만 명 중 1만 7293명만이 해방되었다.[46]

전쟁으로 심하게 손상된 궁전 단지는 완전히 바뀌었다. 후궁, 등대, 궁전은 철거되고 궁전 부지는 정원으로 바뀌었으며, 후궁 자리에는 새로운 궁전이 세워졌다.[7][47][40] 경이로운 집은 거의 손상되지 않아 영국 통치 당국의 주요 사무국이 되었다.[39][48] 1897년 경이로운 집에 시계탑이 추가되었다.[47] HMS 글래스고호의 잔해는 항구에 남아 몇 년 동안 돛대가 보였다가 1912년에 고철로 해체되었다.[49]

5. 2. 잔지바르의 식민지화

1896년 8월 25일, 영국의 식민 경영에 협조적이었던 잔지바르의 술탄 하마드 빈 수와이니가 사망했다. 이후 술탄의 지위는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그의 조카 할리드 빈 바르가쉬에게 넘어갔다. 영국은 하무드 빈 무함메드를 새 술탄 후보로 지지하며 바르가쉬에게 퇴위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바르가쉬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약 2,800명 규모의 군대를 소집하고 항구에 정박 중이던 요트 HMS 글래스고를 무장시켰다.

바르가쉬군이 궁전을 요새화하는 동안, 영국 해군은 에드가급 순양함 HMS 세인트조지 호, 펄급 장갑순양함 HMS 필로멜 호, 아처급 순양함 HMS 라쿤 호, 포함 HMS 트러쉬 호와 HMS 스패로우 호 등 5척의 전함을 궁궐 정면 항구에 집결시켰다. 영국군은 해병대를 상륙시켜 전 영국 해군 중위 로이드 매슈 장군이 지휘하는 900명 규모의 잔지바르 왕당파 정규군을 지원했다.

1896년 영국 신문에 실린 잔지바르 석 타운 폭격 사진


미국 대표부를 통한 평화 협상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잔지바르는 1896년 8월 27일 오전 9시에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2분 뒤, 영국 해군은 잔지바르 궁궐과 HMS 글래스고를 향해 함포 사격을 개시했고, 글래스고는 곧 격침되었다. 궁궐이 무너지면서 사상자가 발생하자, 바르가쉬는 독일 제국 영사관으로 피신했다. 포격은 38분 만에 중지되었으며, 잔지바르 측 사상자는 500여 명에 달했다.

영국은 독일에 바르가쉬의 인도를 요구했지만, 바르가쉬는 1896년 10월 2일 해상으로 탈출했다. 그는 1916년 영국에 체포될 때까지 다르에스살람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1925년 몸바사에서 사망했다.

5. 3. 노예 제도 폐지

영국은 잔지바르의 술탄 하무드 빈 무함메드를 지지했으며,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국은 할리드 빈 바르가쉬에게 술탄에서 물러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바르가쉬는 이를 거절하고 군대를 소집했다. 1896년 하무드는 영국의 제안에 따라 잔지바르에서 모든 형태의 노예 제도를 폐지했다.[36] 노예 해방은 노예들이 정부 사무소에 출두해야 했으며, 느린 과정이었다. 10년 이내에 1891년 추산 인구 6만 명 중 1만 7293명만이 해방되었다.[46]

6. 역사적 평가 및 한국적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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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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